불굴의 의지, 항상 미래를 대비하는 준비성, 아이템을 찾을 수 있는 통찰력, 본능적인 감각이 있었던 유통의 달인이 왜, 브랜드 비즈니스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을까? 불가항력인 외부 요인은 없었다. 단지 브랜딩 길에 놓인 갈림길 중, 틀리진 않지만 맞지도 않은 결정을 했을 뿐이다.
무관심했던 '무형의 가치'
자사의 브랜드가 없이 대기업에 의존한 매출구조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생력을 가진 튼튼한 기업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은 탁월했다. 그러나 브랜드의 가치에 대한 고민이 비교적 부족했다. 자사의 브랜드를 프리미엄 과일 브랜드로 결정한 이유도 다음 이유와 같다. 백화점 과일은 맛은 좋지만, 가격이 무척 비싸다. 그 비싼 과일을 기꺼이 구매하는 고객이 있다. 자사 브랜드의 경쟁사는 현대 백화점과 신세계 백화점으로 설정한 셈이다. 경쟁사에서 고객을 우리 쪽으로 가져오는 전략은 이랬다.
'품질은 백화점 수준, 가격은 백화점보다 10~20% 저렴하면 분명히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당시 회사가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과일의 품질은 확실히 백화점급 이상이었다. 더 낮은 가격으로 높은 퀄리티의 과일을 제공할 수 있는 컨디션이었다.
대표님이 놓친 것은 이것이었다. 백화점 식품 코너에 있는 과일은 시장이나, 마트에서 구입하는 과일보다 가격이 훨씬 높다. 그럼에도 유명 백화점에서 과일을 구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기업·백화점이 주는 신뢰, 백화점에서 과일을 구매할 수 있다는 자부심, 서비스에 대한 만족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백화점에서 과일을 구매하는 사람은 돈은 고려 대상이 아닐 것이다. 프리미엄 브랜드를 표방했다면 단가 경쟁이 아닌 브랜드 가치에 대해 고민했어야 했다.
하지만 회사는 자사의 무형의 가치를 드러내기 보다, 가격 경쟁의 길을 택했다.
불명확한 타겟
처음 그린 잠재 고객은 '강남과 분당에 거주하며 미취학 아동을 키우고 있는 30대 후반 어머니였다. 가족을 위해 가격은 조금 비싸더라도 최상급 과일을 기꺼이 구매할 수 있는 여성이 대상이었다. 실제 경쟁사의 주요 고객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하루가 지나면 고객이 점점 넓어졌다. 타겟이 넓어진다고 매출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둘씩 늘어난 대상은 마침내 소득 수준이 높고 가정이 있는 30대 후반의 여성 + 임신을 한 신혼 여성 + 독신생활을 하는 직장인 여성 + 과일을 좋아하는 남자 + 건강한 삶에 관심이 있는 5060 장년층 + 회사 근처 아파트 주부들로 확장되었다.
프리미엄 과일 브랜드의 잠재 고객은 '과일을 좋아하는 20~60대 사람'이 되었다.
전통 미디어에 집중
드라마 제작사 측 PPL 제안이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한바탕 부부싸움을 치르고 남편이 방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면 아내가 뜬금없이 침대에 앉아 분을 삭이며 육포를 뜯는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PPL은 여전히 마케팅 수단으로 효과적이다. 잘 노출된 PPL은 많은 대중에게 노출된다. 효과가 좋은만큼 PPL 협찬엔 큰 비용이 들어간다. 중소기업 온라인 마케팅 한 달 예산이 드라마 속 10초 등장으로 사용된다.
당시 전문 마케터가 없는 상황이었던 우리 회사는 드라마 PPL은 물론 아침 방송, 여성 잡지 인터뷰 등에 꽤 큰 비용을 쏟았다. 확실히 자사 홈페이지 유입 증가 효과는 있었다. 단, 일시적인 상승에 그쳐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왔다.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었지만 '이 브랜드가 정확히 어떤 브랜드고 어떤 매력이 있는지'알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이 외에도 기업 케이터링 서비스(과일을 좋아하는 직장인 대상) 홍보를 위해 도심에서 과일과 팜플렛을 나눠주는 홍보를 일주일에 한 번씩 진행하거나 인근 아파트에 전단을 붙였다.
막대한 예산을 썼지만 남은 것은 창고에 쌓인 브로셔와 팜플렛뿐이었다.
목적과 수단의 혼동
온라인 마케팅은 전문 대행사에 맡겼다. 당시 나의 포지션은 비서 지원, 쇼핑몰 MD, B to B 영업 지원, 유통 지원, 산지 원물 담당자였다. 성과 보고 미팅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담당자가 보고하는 내용은 당시 나의 전문 영역이 아니라 정확히 알 순 없었다. 그러나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보고서엔 페이스북 페이지에 팬이 몇 명인지, 블로그에 콘텐츠를 몇 개를 올렸고 몇 명이 방문했는지와 같은 양적 확장에 대한 내용뿐이었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팬과 블로그 방문자의 증가가 왜 중요한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도, 알려주지도 않았다. 물론 자사 온라인 미디어 볼륨을 키우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수단의 영역이다. PPL이나 잡지, 라디오같이 온라인 미디어도 브랜드를 알리는 방법의 하나인 셈이다. 중요한건 양적 증가가 아닌 이 고객들에게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지, 매출로 연결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적 논의도 함께 이루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대행사는 버스 측면광고와 라디오 광고, 언론보도 패키지 상품을 설명할 뿐이었다.
미팅 마지막, 기업 가치 평가에서 페이스북 페이지 팬 1명은 10,000원으로 평가된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결론은?
누군가의 성공담, 혹은 실패담은 항상 결과론으로 그치는 일이 많다. '그때 이 선택을 했으면 훨씬 좋았겠지.'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아마 승승장구해서 우리나라 대표 과일 기업의 브랜드로 성장했다면, 위 과정은 드라마틱한 성공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퇴사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가끔 최근 활동들을 살펴본다. 여전히 건재하다. 다만, 당시 대표님이 처음에 그렸던, 한국의 델몬트, 한국의 썬키스트같이 과일 하면 탁! 떠오르는 브랜드로 성장하진 못했다. 앞서 살펴본 것 처럼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나는 언젠가는 이 브랜드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 것이라 믿는다. 다만, 브랜드 가치를 드러내는 일의 가치에 조금 더 집중한다면 앞서 그렸던 브랜드라는 청사진을 더 빨리 그릴 수 있지 않을까.
by 마케터 정보람찬
boramchan@brancos.co.kr
브랜드 마케팅 스튜디오, 브랜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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