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자리는 마케팅 팀장님이 일하고 계신다. 뒤를 돌아봐도 마케터가 앉아 있다. 회의실 화이트보드 위로 마케팅 회의의 흔적들이 남아 있고, 직원들 대화 속에 마케팅 용어들이 오고 간다. 출입구 현판 아래 작지만 뚜렷한 문장이 적혀있다. '브랜드 마케팅 스튜디오'
"나는 지금 처음으로, 마케터와 함께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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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브랜드 디자인 전문회사'에서 일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직했던 나의 첫 직장이었고, 전부 내 나이 또래의 여자 디자이너들로 이루어진 작은 스타트업 회사였다. 대부분의 디자인 회사들이 그렇듯이 모던하고 유니크한 인테리어에 감성적인 음악이 흐르는 사무실은 아주 매력적이었고, 책꽂이에는 여러 디자인 서적들과 인쇄물 샘플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사무실 벽 여기저기 예쁜 감성의 디자인 포스터가 걸려있고, 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다. 디자인적 영감을 얻기 위한 해외 워크샵과 각종 문화생활들을 회사에서 지원해 주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디자이너들에게는 정말 좋은 복지였다.
그곳에서 내가 주로 하던 업무는 로고 디자인, 그리고 편집 디자인. 가끔은 네이밍도 직접했다. 디자이너들은 좋은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많은 디자인 정보를 공유하고 회의실에 모여 서로의 디자인을 두고 각자의 견해를 나누기도 했다. 나와 다른 디자이너들이 작업한 다양한 디자인 결과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많은 도움이 됐다.
회사에는 나보다 연차가 오래된 디자이너 분도 계셨는데, 그분에게는 프로그램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들을 많이 배우기도 했다. 편집 디자인 덕분에 인쇄물을 다루기도 하다 보니 인쇄소와 연락하고 직접 방문하는 일도 잦았다. 당시를 회상하면 나는 하루하루 디자인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약 3년의 시간을 보냈다. 매일 같은 사람들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깊은 매너리즘이 찾아온 건 그쯤이었다. 반복적인 일상이 지겹고 지치는 것을 넘어서서 기어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까지도 극심한 스트레스가 찾아오기 시작할 때, 나는 이직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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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코스와의 첫 만남은 작년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작년 이브날은 징검다리 휴일이라 작은 규모의 회사들 사이에서는 재량껏 쉬는 곳도 종종 있었는데, 마침 딱 그날에 면접이 잡힌 것이었다. '혹시 휴일 개념도 없이 일만 하기 좋아하는 워커홀릭들의 집단은 아닐까.' 살짝 당황스러움을 안고 그날 잡았던 친구들과의 약속도 미루고 갔던 날, 면접을 진행했던 팀장님이 멋쩍게 웃으면서 "날짜를 잡고 나서 뒤늦게 생각해 보니까 오늘이 이브더라고요. 죄송해요."라고 하셨다.
브랜코스 사무실은 말끔하고 심플했다. 여느 디자인 회사처럼 모던한 느낌의 인테리어가 예뻤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끈 건 화기애애하게 일하고 있던... 여러 명의 남직원들! 보는 것만으로도 어색했다. 온통 여직원들밖에 없던 곳에서 마음 편히(?) 일하던 내게는, 그게 또 작은 부담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설렘 같은 건 없었냐고? 아니, 전혀.
마케터 출신의 대표님과 마케팅 팀장님 두 분이서 내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들고 근처 카페에서 면접을 진행하셨다. 디자인 회사에서 경험했던 면접과는 달랐던 건, 역시 내 포트폴리오에 수록된 작품들을 하나씩 브리핑을 해야 한다거나 디자인적 스킬에 대한 질의응답 같은 것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디자인에 대한 심층적인 질문보다, 주로 '나'에 대한 질문이 더 많았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그게 너무 신선한 경험이라 내심 불안했다.
브랜코스가 마케팅 회사라는 것은 이미 채용공고를 통해 대략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사실 이 '마케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렇다. 대학 다닐 시절부터 계속 디자인의 우물 안에서만 놀던 내가, 마케팅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영어 철자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저 마케터라 하면 모름지기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고 말재간도 좋고 살짝의 거짓말도 여유롭게 할 수 있는, 소위 '세일즈맨'의 이미지가 강했던 것이다. 그런 내게 "마케터가 모인 스타트업 회사의 분위기는 어떨까?" 하고 묻는다면, 글쎄- 놀기도 잘 놀고, 다들 술도 잘 먹어서 새벽까지 달리는 회식도 잦고, 다이내믹한 타입의 게임들도 좋아하고, 음악적인 성향으로 말하자면 시끄러운 비트의 EDM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일을 할 것 같은, 완전히 하이텐션 스타일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 와중에 면접을 한창 진행하던 팀장님이 질문했다. "우리는 장난이 좀 많은 편인데, 가끔 심해질 때도 있어서요.(웃음) 사소한 말에 상처받고, 뭐 그런 성격은 아니시죠?" 나는 무슨 질문인지 생각도 하기 전에 그저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대답은 했지만, 내가 줄곧 그려오던 분위기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약간의 긴장감이 밀려왔다. 사실 나는 엄청 외향적인 성격도 아닌데... 내가 그런 분위기에 잘 적응이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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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꽤 잘 적응하고 있다.
회사 분위기는 자유롭고 유쾌하지만, 그렇다고 EDM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일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한 마케팅 팀장님은 감성적인 재즈를 좋아한다! 감수성이 풍부하신 분들도 많고, 마케터라고 해서 모두가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다. 나와 같이 커피를 즐길 줄 알고, 대표님을 제외하면 다들 주량도 영 시원치 않은 것 같다. 하하.
입사하기 전에 내가 생각했던 근거 없는 예상들이, 이제는 살짝 민망해질 정도. 아 참, 맞춘 것이 하나 있다. 대부분이 게임을 아주 좋아한다. 이전 회사에서는 잘 경험하지 못했던 문화다. 점심시간마다 메뉴를 정하는 게임을 하거나, 커피 쏘는 것을 걸고 다양한 내기 게임을 하는 것이 요즘의 소소한 즐거움이 됐다.
어쨌든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건, 생각보다 흥미롭다. 이건 나와 같은 디자이너들과 일했을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내가 그동안 생각하던 '마케터'에 대한 이미지가 한순간에 바뀐 계기가 됐다. 정말 어렵기도 하고, 디자인만큼이나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불편한 부분이 아주 없지는 않다. 아무래도 디자이너들만 있던 이전 회사에 비해서는 내가 디자이너로서 일하기에 그리 완벽한 업무 환경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미처 갖춰지지 않은 것들은 내가 하나하나 채워가는 재미가 있다. 며칠 전에는 대표님께 부탁드려서, 종이 샘플북 두 개를 구매했다. 나머지는 내가 더 노력해서 만들어 나가면 되겠지.
디자인 업무를 볼 때는 나름의 프로가 되었다가,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작성할 때는 또 한없이 아마추어가 되어서 열심히 배우기도 한다. 가끔은 마케터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선한 발상들을 내가 또 하나의 디자인적 영감으로 사용하는 일도 있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어나는 시너지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요즘, 나는 모든 것이 즐겁다. 내가 모르던 분야를 하나씩 알아가는 일도 굉장히 새롭다.
다른 멤버들도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by 디자이너 유단희
yudanhee@brancos.co.kr
- 브랜드 마케팅 스튜디오, 브랜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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